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군 6진 (문단 편집) == 6진의 개척 == 세종 15년(1433년), 두만강 남안의 [[회령군|와무허]] 지역에 정착 중이던 오돌리족이 경쟁 부족인 우디거족의 기습을 받아 족장인 건주좌위 [[아이신기오로 먼터무]]가 사망하고 잔존부족은 두만강 너머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기회를 틈타 세종은 [[김종서(조선)|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해 본격적인 6진 개척을 시작했다. 세종 16년(1434년), 석막에 있던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 지금의 [[종성군]] 행영면.]로 이동시키고 부거에 있던 [[경원군|경원도호부]]를 옛 치소인 공주 근처의 회질가(會叱家)[* 지금의 경원군 경원면.]로 이동시킨 후 그 자리에는 부거현(富居縣)을 설치했다. 또한 두만강 남안의 요충지인 와무허 지역에 진을 새로 설치하고 이를 [[회령군|회령진]](會寧鎭)이라고 하고 그 해 가을에 회령진을 회령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듬해인 세종 17년(1435년), 영북진에 군을 설치하여 [[종성군]](鍾城郡)으로 개칭하여 영북진 절제사로 하여금 종성군 지군사를 겸하게 했고 또한 경원부의 옛 치소였던 공주를 경원부에서 분리시켜 새로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하여 세종 19년(1437년)에 공성현을 [[경흥군]](慶興郡)으로 개칭했다. 세종 22년(1440년), 종성군의 치소가 두만강에서 멀어 여진족의 침입을 감시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치소를 백안수소에서 수주(愁州)[* 지금의 종성군 종성면.]로 이동시켰다. 또한 경원과 종성 사이에 위치한 다온평(多溫平)에 [[온성부]]를 새로 설치하여 이듬해인 세종 23년(1441년)에 종성부와 [[온성부]]를 각각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세종 25년(1443년)에는 경흥군을 경흥도호부로 승격시키고 6진 개척과 동시에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종 24년(1442년)부터 두만강을 따라 회령부터 경흥까지 건설하기 시작한 장성을 완공했다. 마지막으로 세종 31년(1449년), 부거현을 폐지하고 부거의 백성들을 석막으로 이주시킨 후 석막의 옛 경원도호부 터를 치소로 하는 [[부령군|부령]](富寧)도호부를 설치하여 부령, 회령, 종성, [[온성부|온성]], 경원, 경흥으로 이어지는 6진의 구축을 마무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